교회사의 한 조각
이 여정은 우연히도 교회 역사의 한 조각 한 조각을 순서 없이 통과합니다. 2일차의 나폴리 앞바다는 사도 바울이 로마로 압송되며 배를 댄 곳이고, 3일차의 성 베드로 대성당은 그 건축비를 대려던 면죄부가 종교개혁의 방아쇠를 당긴 현장이며, 8일차 오르비에토의 우물은 그 종교개혁의 여파로 교황이 도망쳐 온 결과물입니다. 그래서 각 날짜의 설명마다 그 자리에 겹쳐 있는 교회사를 성경 · 교회사 상자로 따로 적어두었습니다.
이탈리아의 성당 이름은 대부분 사람 이름입니다. 그중 성경에 나오는 인물은 우리말 성경과 표기가 달라 못 알아보기 쉽습니다. 같은 사람입니다.
피에트로(Pietro) = 베드로 — 성 베드로 대성당(San Pietro) · 파올로(Paolo) = 바울 · 마르코(Marco) = 마가 — 산 마르코 대성당 · 조반니(Giovanni) = 요한 — 산 조반니 세례당 · 마리아(Maria) = 마리아 —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꽃의 성모) · 산타 크로체(Santa Croce)는 사람이 아니라 거룩한 십자가라는 뜻입니다.
반대로, 이번 여정에서 만나는 성인 대부분은 성경에 나오지 않는 후대 인물이라 대응하는 우리말 성경 이름이 없습니다. 신약이 끝나고 200~400년쯤 뒤, 박해기와 그 직후에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제노(Zeno) 4세기 베로나 주교 · 피르모·루스티코(Firmo, Rustico) 4세기 순교자로 전해지는 두 사람 · 젠나로(Gennaro) 나폴리의 수호성인, 305년경 순교 · 안토니노(Antonino) 소렌토의 수호성인 · 브리치오(Brizio) 오르비에토 두오모 예배당의 이름 · 파트리치오(Patrizio)는 뜻밖에도 아일랜드의 성 패트릭입니다 — 오르비에토 우물 이름이 그의 전설에서 왔습니다.
Incheon — Roma
인천 → 로마 · 티웨이항공 TW405 직항
로마 Roma
비행기가 착륙하는 순간, 2700년 된 도시에 들어옵니다. 전설은 날짜까지 정확합니다 — 기원전 753년 4월 21일, 늑대 젖을 먹고 자란 쌍둥이 로물루스와 레무스 중 형이 팔라티노 언덕에 성벽 선을 그었고, 그 선을 비웃으며 뛰어넘은 동생을 죽였다는 이야기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고고학이 이 전설을 크게 부정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팔라티노 언덕에서 실제로 기원전 8세기 오두막 자리가 발굴됐습니다.
로마는 형태를 세 번 바꿉니다. 왕정(BC 753–509) → 공화정(BC 509–27) → 제정(BC 27–AD 476). 공화정을 끝낸 것은 카이사르의 암살(BC 44)과 그 후계 옥타비아누스였고, 그가 '아우구스투스'가 되면서 제국이 시작됩니다. 예수의 탄생 기사에 나오는 "가이사 아구스도"가 바로 이 사람입니다.
아우구스투스 — 성경에 이름이 나오는 황제
본명은 옥타비아누스. 카이사르의 양자였고, 열여덟에 상속자가 되어 13년간의 내전 끝에 기원전 27년 원로원에게서 아우구스투스(존엄한 자)라는 칭호를 받습니다. 그는 끝까지 ‘황제’라는 말을 쓰지 않고 프린켑스(제1시민)라 자칭했습니다. 공화정을 유지하는 척하면서 모든 권력을 쥔 것입니다.
그가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 “나는 벽돌의 로마를 물려받아 대리석의 로마를 남긴다.” 실제로 그의 40여 년 통치 동안 로마는 신전과 극장, 수도교로 다시 지어졌습니다. 3일차에 볼 트레비 분수의 물을 끌어온 아쿠아 비르고 수도교(기원전 19년)도 그의 오른팔 아그리파가 놓은 것입니다.
신약에서 이름이 언급되는 로마 황제는 많지 않습니다. 그중 첫 번째가 이 사람입니다.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누가복음 2:1, 3
요셉과 마리아가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 간 이유가 이 황제의 인구조사 명령이었습니다. 로마의 행정 문서 한 장이 성탄 이야기의 배경인 셈입니다.
더 긴 영향도 있습니다. 아우구스투스가 연 약 200년의 평화 팍스 로마나와, 제국을 그물처럼 덮은 도로망·공용 그리스어가 없었다면 바울의 여행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1일차에 읽은 아피아 가도가 바로 그 그물의 첫 줄이었습니다. 교회사에서 흔히 “때가 찼을 때”(갈라디아서 4:4)라는 표현을 이 상황과 겹쳐 읽습니다.
서로마가 무너진 뒤에도 로마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황제 대신 교황이 남았고, 도시는 1000년 넘게 교황령의 수도로 살았습니다. 1870년에야 통일 이탈리아에 편입됐으니, '이탈리아의 수도 로마'는 이 도시의 역사에서 가장 짧고 가장 최근의 챕터입니다.

인구 약 280만, 면적은 서울의 두 배가 넘지만 관광 구역은 의외로 좁아서 대부분 걸어 다닐 수 있습니다. 도시 전체가 1980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습니다.
로마 교회는 사도가 세운 교회가 아닙니다. 누가 처음 복음을 전했는지 기록이 없습니다.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있던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사도행전 2:10)들이 돌아가 시작했으리라 추정할 뿐입니다.
확실한 것은 바울이 가보지도 않은 도시의 교회에 편지를 썼다는 사실입니다. 로마서는 57년경 고린도에서 쓰였는데, 그때 이미 로마에는 상당한 규모의 신자 공동체가 있었습니다. 16장에는 그가 이름을 아는 26명의 인사가 나옵니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이 길이 막혔더니… 로마서 1:13
바울은 결국 죄수가 되어 그 길을 갑니다. 그 항해가 2일차에 지나갈 나폴리만에서 끝납니다.
아피아 가도 Via Appia일정 외 배경
이 길은 이번 일정에 들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따로 한 장을 쓰는 이유는, 2일차에 버스로 남쪽 나폴리만까지 내려갔다가 로마로 되돌아오는 그 왕복이, 사도 바울이 죄수로 걸어 올라온 경로를 거꾸로 되짚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창밖을 보실 때 이 길을 떠올리시면 하루가 달라집니다.
기원전 312년(약 2,338년 전), 로마가 처음으로 길을 발명하다
삼니움 전쟁이 한창이던 기원전 312년(약 2,338년 전), 감찰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가 로마에서 카푸아까지 약 195km의 포장도로를 놓습니다. 자기 이름을 붙인 이 길이 비아 아피아입니다. 목적은 낭만이 아니라 군대였습니다 — 병력을 남부까지 비 오는 계절에도 빠르게 보내기 위한 군사 인프라였습니다.
이후 기원전 268년경(약 2,294년 전) 베네벤툼, 기원전 191년경 브린디시까지 늘어나 총 약 540km가 됩니다. 브린디시는 그리스와 동방으로 떠나는 항구였으니, 이 길은 사실상 로마와 동지중해를 잇는 대동맥이었습니다. 로마인들은 이 길을 레지나 비아룸(regina viarum) — 길의 여왕이라 불렀습니다.
어떻게 2300년을 버텼나
공법이 남달랐습니다. 땅을 1m 넘게 파내고 굵은 자갈(statumen)을 깔고, 그 위에 잔자갈과 석회를 섞은 층(rudus), 다시 고운 자갈층(nucleus)을 다진 뒤, 맨 위에 현무암 포석을 틈이 안 보이게 맞물려 얹었습니다. 폭은 약 4.1m — 마차 두 대가 교행할 수 있는 치수입니다. 단면은 가운데가 볼록해 빗물이 양옆 도랑으로 빠졌습니다.
로마 남쪽 62km 구간은 거의 완벽한 직선으로 냈습니다. 지금도 그 원래 포석 위를 걸을 수 있습니다.

이 길을 걸어간 사람들
스파르타쿠스의 반란군 (기원전 71년, 약 2,097년 전). 노예 반란을 진압한 크라수스는 생포한 6000명을 카푸아에서 로마까지 아피아 가도 양편에 십자가로 매달았습니다. 약 200km에 걸친 6000개의 십자가였습니다. 로마가 반란에 어떻게 답하는지를 길 자체로 보여준 것입니다. 130년 뒤 같은 형틀에서 처형된 한 사람의 이야기가 이 길을 따라 로마로 들어옵니다.
키케로. 이 길가에 그의 별장이 있었습니다. 기원전 52년(약 2,078년 전) 정적 클로디우스가 아피아 가도에서 밀로 일행과 마주쳐 살해됐고, 키케로는 그 재판의 변론을 맡았습니다. 정작 그 자신도 기원전 43년 안토니우스가 보낸 자객에게 이 길 부근에서 죽습니다.
호라티우스 (기원전 37년, 약 2,063년 전). 시인은 브린디시까지 가는 여행을 풍자시로 남겼습니다(『풍자시』 1권 5편). 늪지의 모기, 형편없는 여관 밥, 요금을 올려 받는 뱃사공에 대한 불평이 그대로 적혀 있어 서양에서 가장 오래된 여행기 중 하나로 꼽힙니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기원전 49년, 약 2,075년 전). 내전이 터지자 폼페이우스는 로마를 버리고 이 길을 따라 브린디시로 후퇴해 배를 타고 그리스로 건너갑니다.
사도 바울 (AD 60년경). 보디올(푸테올리)에 내린 바울은 이 길을 따라 로마로 올라갑니다. 사도행전은 마중 나온 사람들이 만난 두 지점을 정확한 지명으로 적습니다.
그 곳 형제들이 우리 소식을 듣고 압비오 광장과 트레이스 타베르네까지 맞으러 오니 바울이 그들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으니라. 사도행전 28:15
압비오 광장(Forum Appii)은 로마에서 약 69km, 트레스 타베르네(세 여관)는 약 53km 지점에 실제로 있던 아피아 가도의 역참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호라티우스도 압비오 광장을 "뱃사공과 인색한 주인들로 가득한 곳"이라고 투덜대며 언급했다는 점입니다. 성경과 로마 풍자시가 같은 장소를 말하는 드문 경우입니다.
왜 "담대한 마음을 얻었다"고 했을까요. 그는 죄수였고, 재판을 받으러 제국의 심장으로 끌려가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얼굴도 모르는 로마의 신자들이 하루 이틀 길을 걸어 나와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와 "쿠오 바디스" 전승. 2세기 외경 『베드로 행전』은, 박해를 피해 로마를 떠나던 베드로가 이 길에서 예수를 만나 "도미네, 쿠오 바디스?(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묻자 "네가 내 백성을 버리니, 내가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러 로마로 간다"는 답을 들었고, 부끄러워 발길을 돌려 순교했다고 전합니다. 그 자리에 세워진 것이 아피아 가도의 도미네 쿠오 바디스 성당입니다. 정경이 아니라 전승이라는 점은 함께 알아두시면 좋습니다.
그리고 카타콤. 로마법은 성벽 안 매장을 금지했습니다. 그래서 아피아 가도 양쪽은 통째로 무덤 거리가 되었고, 땅값이 없는 지하로 파 내려간 것이 카타콤입니다. 산 칼리스토 카타콤에는 3세기 교황들이 묻혔고, 산 세바스티아노 카타콤이 있던 곳의 지명 ad catacumbas('움푹한 곳 옆')에서 catacomb이라는 단어 자체가 나왔습니다. 박해기의 신자들이 숨어 살았다기보다는, 죽은 이를 묻고 그 무덤가에서 모였던 곳으로 보는 것이 오늘의 정설입니다.
지금의 아피아 가도
로마 구간은 아피아 안티카 지역공원으로 보호됩니다. 기원전 1세기 중반에 세운 원통형 무덤 체칠리아 메텔라 묘가 대표적인 랜드마크이고, 일요일에는 차량 통행이 막혀 걷거나 자전거로 다닐 수 있습니다. 18~19세기 그랜드 투어 시절 괴테와 바이런이 폐허가 된 이 무덤 거리를 낭만적 풍경으로 남겼습니다.
2024년 7월, 이 길은 「Via Appia. Regina Viarum」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습니다. 이탈리아의 60번째 등재이자, 도로 자체가 세계유산이 된 드문 사례입니다.
Pompei · Sorrento · Napoli
로마 → 폼페이 유적지 → 소렌토 → 나폴리 → 로마

폼페이 유적지 Pompei내부
폼페이는 파괴된 도시가 아닙니다. 봉인된 도시입니다. 이 한 문장이 오늘 보실 모든 것을 설명합니다.
화산이 터지기 전의 폼페이
기원전 7세기 오스키인의 마을로 출발해 그리스·에트루리아·삼니움의 손을 차례로 거쳤고, 기원전 89년(약 2,115년 전) 술라에게 정복된 뒤 기원전 80년 로마 식민시가 됩니다. 항구를 낀 부유한 상업·휴양 도시였고 인구는 1만1000~1만5000명으로 추정됩니다. 도시에는 목욕탕 세 곳, 극장 두 곳, 원형경기장, 사창가, 그리고 빵집만 30곳 이상이 있었습니다.
서기 62년 큰 지진이 도시를 흔들었고, 17년이 지나도록 복구 공사가 진행 중이었습니다. 비계와 자재가 널려 있는 채로 마지막 날을 맞은 셈입니다.
이틀에 걸친 최후
전통적으로 서기 79년 8월 24일로 알려졌지만, 발굴된 가을 과일과 난방용 화로, 그리고 최근 벽에서 나온 목탄 낙서의 날짜 때문에 10월 하순이었다는 설이 현재 더 유력합니다.
분화는 두 단계였습니다. 첫날 오후, 화산은 20km 높이로 기둥을 뿜었고 부석이 우박처럼 쏟아져 지붕이 내려앉았습니다. 이때는 도망칠 시간이 있었고 실제로 대부분이 빠져나갔습니다. 그러나 이튿날 새벽, 섭씨 300도 안팎의 화쇄류가 시속 100km로 비탈을 타고 내려와 남아 있던 사람들을 그 자리에서 즉사시켰습니다.
이 광경을 바다 건너에서 지켜본 열일곱 살 소년이 훗날 상세한 기록을 남깁니다. 소(小) 플리니우스입니다. 그의 삼촌 대(大) 플리니우스는 함대를 이끌고 구조하러 갔다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오늘날 화산학에서 이런 유형의 분화를 '플리니식 분화'라 부르는 이유입니다.
화산재는 최대 6m까지 쌓였고, 공기가 차단된 그 아래에서 도시는 썩지 않았습니다. 빵집 화덕 속의 빵, 벽에 긁어놓은 낙서, 선거 벽보, 술집 계산대, 배수구까지 서기 1세기의 평범한 하루가 통째로 남았습니다.
석고 캐스팅 — 빈 공간을 뜨다
1592년(약 434년 전) 수로 공사를 하던 건축가 도메니코 폰타나가 벽화를 스치고 지나갔지만 그냥 덮어버렸습니다. 본격 발굴은 1748년 부르봉 왕가의 후원으로 시작됩니다. 초기 발굴은 사실상 보물찾기에 가까워, 조각과 벽화만 뜯어갔습니다.
결정적 전환은 1863년이었습니다. 발굴 책임자 주세페 피오렐리는 화산재 층에서 이따금 나오는 빈 구멍이 시신이 썩고 남은 공간임을 알아채고, 거기에 석고를 부었습니다. 굳혀서 재를 걷어내자 2000년 전의 마지막 자세가 그대로 나왔습니다 — 얼굴을 가린 사람, 서로를 안은 가족, 목줄에 묶인 채 몸부림친 개. 고고학이 유물이 아니라 부재(不在)를 떠낸 드문 사례입니다.

폼페이가 묻히기 약 18년 전, 이 지역에는 이미 그리스도인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28장은 로마로 압송되던 바울이 나폴리만의 항구 보디올(푸테올리, 오늘의 포추올리)에 상륙한 장면을 기록합니다.
거기서 형제들을 만나 그들의 청함을 받아 이레를 함께 머무니라. 사도행전 28:14
바울이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그곳에 "형제들"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로마 제국의 항구도시를 따라 복음이 얼마나 빨리 퍼졌는지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폼페이는 그 항구에서 불과 20km 거리에 있었습니다.
폼페이 유적에서 나온 사토르 정방형(ROTAS-OPERA-TENET-AREPO-SATOR)이라는 회문 낙서를 두고, 글자를 재배열하면 주기도문의 첫 두 단어 PATER NOSTER가 십자 형태로 나온다는 이유로 초기 기독교의 흔적이라는 주장이 오래 있었습니다. 다만 학계에서 확정된 것은 아니고 반론도 많습니다. "가능성이 논의되는 단서" 정도로 알아두시면 충분합니다.



소렌토 Sorrento조망
폼페이의 잿빛에서 나와 해안으로 내려가면 분위기가 완전히 바뀝니다. 로마 시대 이름은 수렌툼(Surrentum). 오디세우스를 노래로 홀렸다는 세이렌(Sirene)의 바다라는 데서 지명이 왔다는 설이 있습니다. 호메로스의 괴물이 지명으로 굳은 셈입니다.
기원전에 그리스인이 정착했고, 로마 제정기에는 티베리우스 황제를 비롯한 귀족들의 여름 별장지였습니다. 도시는 나폴리만을 내려다보는 40m 높이의 응회암 절벽 위에 얹혀 있고, 그 아래 마리나 그란데에 작은 어항이 붙어 있습니다. 절벽을 파고 만든 경사로가 위아래를 잇습니다.
중심은 타소 광장입니다. 이 도시에서 태어난 16세기 시인 토르콰토 타소의 이름을 땄습니다. 좁은 골목마다 레몬 가게와 목공예점이 이어집니다.
수호성인은 성 안토니노(약 555~625)로, 9세기에 사라센의 공격에서 도시를 구했다는 전승이 있습니다. 구시가 한복판의 성 안토니노 대성당 지하에 그의 유해가 있고, 2월 14일이 축일입니다.
나폴리 Napoli조망
기원전 8세기 쿠마이의 그리스인들이 이 자리에 '파르테노페'를 세웠고, 기원전 470년경(약 2,496년 전) 그 옆에 도시를 다시 지으며 네아폴리스(Neapolis) — 새 도시라 불렀습니다. 그 이름이 2500년을 굴러 오늘의 나폴리가 됐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리스식 격자 도로가 아직 살아 있다는 점입니다. 구시가를 자로 그은 듯 가르는 좁고 긴 골목 스파카나폴리('나폴리를 쪼개다')가 바로 그 고대 도로입니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도시가 정말로 갈라져 보입니다.

1282년(약 744년 전)부터 1816년까지 나폴리 왕국의 수도였고, 18세기에는 파리·런던 다음가는 유럽의 대도시였습니다. 프랑스 앙주 가문, 스페인 아라곤 가문, 오스트리아, 부르봉 가문이 차례로 지배했고 그 층이 건축에 그대로 쌓여 있습니다. 1995년 역사지구가 유네스코에 등재됐습니다.
바다에 떠 있는 달걀성(카스텔 델로보)은 1140년경(약 886년 전) 건물입니다. 이름은 시인 베르길리우스가 성 기초에 달걀을 묻어두었고 그 달걀이 깨지면 성이 무너진다는 중세 전설에서 왔습니다. 앙주 가문이 지은 누오보성(1279)은 항구 쪽에 있습니다.
나폴리의 수호성인은 산 젠나로(성 야누아리우스)입니다. 인근 베네벤토의 주교로, 디오클레티아누스 박해 때인 305년경(약 1,721년 전) 포추올리에서 순교했다고 전해집니다. 사자굴에 던졌으나 짐승이 해치지 않아 결국 참수했다는 이야기가 함께 전합니다.
대성당(두오모)에는 그의 굳은 피라고 하는 유물이 보관돼 있고, 해마다 세 차례 — 5월 첫 토요일, 9월 19일, 12월 16일 — 공개 예식에서 피가 액체로 변하는 현상이 관찰된다고 보고됩니다. 나폴리 사람들은 이것이 일어나지 않는 해를 불길하게 여깁니다. 과학적 설명 시도가 여럿 있었고 교회도 이를 신앙의 필수 조건으로 규정하지 않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박해(303~311)는 로마 제국의 마지막이자 가장 조직적인 기독교 탄압이었고, 그 직후인 313년(약 1,713년 전) 밀라노 칙령으로 상황이 완전히 뒤집힙니다. 3일차에 보게 될 바티칸의 규모는 그 역전의 결과물입니다.

Roma — la giornata
바티칸박물관 → 성 베드로 성당 → 스페인 계단 → 트레비 분수 → 베네치아 광장 → 콜로세움(전경)

바티칸 박물관 Musei Vaticani내부
세계 최대급 미술관이 조각 딱 한 점에서 시작했습니다. 1506년(약 520년 전) 1월, 로마의 한 포도밭에서 농부가 땅을 파다 대리석을 건드립니다. 트로이의 사제가 뱀에게 감겨 죽는 장면을 새긴 라오콘 군상이었습니다. 교황 율리오 2세는 그날 미켈란젤로를 보내 확인시킨 뒤 곧바로 사들여 벨베데레 정원에 세웠고, 그것이 교황청 컬렉션의 출발점이 됩니다. 지금은 24개 전시관, 관람 동선만 약 7km입니다.
시스티나 예배당 — 조각가가 그린 천장
예배당 건물 자체는 1473~1481년 교황 식스토 4세가 지었고, 그의 이름 (Sisto)이 그대로 방 이름이 됐습니다. 크기는 구약에 기록된 솔로몬 성전의 비율을 따랐다고 전해집니다. 지금도 이 방은 미술관이 아니라 교황을 뽑는 콘클라베가 열리는 장소입니다.
미켈란젤로는 1508~1512년 천장에 창세기 아홉 장면을 그렸습니다. 본인은 스스로를 화가가 아니라 조각가로 여겼고 이 일을 여러 번 거절했습니다. 결국 4년간 목을 젖힌 채 서서 그렸고, 친구에게 보낸 시에서 "턱이 배에 닿고 눈이 뒤통수로 갔다"고 투덜댔습니다. 가장 유명한 '아담의 창조'에서 신과 인간의 손가락이 끝내 닿지 않는 그 몇 센티미터가 이 방의 핵심입니다.
24년 뒤인 1536~1541년, 예순을 넘긴 그가 같은 방 제단 벽에 '최후의 심판'을 그립니다. 천장의 밝고 균형 잡힌 세계와 달리 이쪽은 어둡고 격렬합니다. 그 사이에 1527년(약 499년 전) 로마 약탈과 종교개혁이 있었습니다. 가죽만 남은 성 바르톨로메오가 들고 있는 얼굴은 미켈란젤로 자신의 자화상입니다.

라파엘로의 방(1508~1524)에는 '아테네 학당'이 있습니다. 플라톤은 하늘을, 아리스토텔레스는 땅을 가리키고, 계단에 널브러진 사람은 디오게네스입니다. 오른쪽 아래에서 이쪽을 보는 검은 모자의 청년이 라파엘로 본인입니다.

박물관에서 놓치지 말 것 다섯 — 지나가는 순서대로
바티칸 박물관은 일방통행이라 되돌아갈 수 없습니다. 아래는 실제 관람 동선에서 만나는 순서이니, 이 다섯만 머리에 넣고 가셔도 하루가 달라집니다.
① 라오콘 군상 — 피오 클레멘티노 박물관. 트로이의 사제 라오콘이 두 아들과 함께 바다뱀에게 감겨 죽는 장면입니다. 목마를 성 안에 들이지 말라고 경고했다가 신들의 벌을 받았다는 이야기죠. 기원전 1세기경 로도스의 조각가 셋이 만든 것으로 전해지고, 대(大) 플리니우스가 “모든 회화와 조각을 통틀어 으뜸”이라 적은 바로 그 작품으로 봅니다.
1506년(약 520년 전) 발굴됐을 때 오른팔이 없었습니다. 당대 학자들은 팔을 힘차게 뻗은 자세로 복원했는데, 1906년 로마의 한 석공 작업장에서 굽은 팔이 발견돼 원래 것으로 확인됐고, 1957년에야 지금의 모습으로 바로잡혔습니다. 450년 동안 틀린 팔을 달고 있었던 셈입니다.

② 벨베데레의 토르소 — 라오콘 바로 근처. 머리도 팔다리도 없이 몸통만 남은 대리석입니다. 기원전 1세기 아테네의 아폴로니오스가 서명을 남겼습니다. 교황 율리오 2세가 미켈란젤로에게 부서진 부분을 복원해 달라 청했지만, 미켈란젤로는 “이미 완벽해서 손댈 수 없다”며 거절했다고 전해집니다.
대신 그는 이 근육을 자기 그림 속에 옮겨 넣었습니다. 시스티나 천장의 인물들과 최후의 심판의 예수 상반신이 이 토르소를 닮은 것은 우연이 아니어서, 미술사에서는 이 조각을 ‘미켈란젤로의 학교’라고 부릅니다. 오늘 하루 안에 원본과 그 영향을 모두 보시는 셈입니다.

③ 지도의 갤러리 — 길이 120m의 복도. 교황 그레고리오 13세가 수학자이자 지도학자인 이냐치오 단티에게 맡겨 1580~1583년(약 445년 전) 단 3년 만에 완성했습니다. 양쪽 벽에 이탈리아 각 지역 지도 40점이 프레스코로 그려져 있고, 천장은 온통 금빛 스투코입니다. 관람객이 가장 많이 감탄하는 구간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정확도입니다. 위성도 항공사진도 없던 시절에 그린 것인데 해안선과 산맥이 놀랍도록 맞습니다. 참고로 이 지도를 주문한 그레고리오 13세가 바로 그레고리력(1582)을 만든 그 교황입니다.

④ 라파엘로의 방 — 아테네 학당 (1509~1511). 교황의 서재였던 서명의 방 벽면입니다. 그릴 당시 라파엘로는 스물여섯이었습니다.
가운데 두 사람이 핵심입니다. 왼쪽에서 하늘을 가리키는 이가 플라톤 (이데아, 곧 위의 세계), 오른쪽에서 손바닥을 땅으로 누르는 이가 아리스토텔레스 (경험, 곧 이 세계)입니다. 서양 철학의 두 방향을 손짓 하나로 요약한 것입니다. 계단에 널브러진 사람은 디오게네스, 앞쪽에서 컴퍼스를 든 이는 유클리드입니다.
얼굴에 당대 인물을 넣은 것도 유명합니다. 플라톤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 유클리드는 건축가 브라만테의 얼굴이고, 앞쪽 계단에 턱을 괴고 혼자 앉은 우울한 인물은 미켈란젤로입니다 — 라파엘로가 시스티나 천장화를 몰래 보고 감탄해 나중에 덧그려 넣었다고 전해집니다. 오른쪽 끝에서 이쪽을 바라보는 검은 모자의 청년이 라파엘로 자신입니다.

⑤ 시스티나 예배당 — 동선의 끝. 천장화(1508~1512)와 제단 벽의 최후의 심판(1536~1541)이 한 방에 있습니다. 같은 사람이 24년 간격을 두고 그렸는데, 천장은 밝고 균형 잡힌 창조의 세계이고 제단 벽은 어둡고 소용돌이치는 심판의 세계입니다. 그 사이에 로마 약탈과 종교개혁이 있었습니다.
숨은 이야기가 둘 있습니다. 하나, 화면 왼쪽에서 벗겨진 살가죽을 들고 있는 성 바르톨로메오의 그 가죽 얼굴이 미켈란젤로의 자화상입니다. 둘, 오른쪽 아래 지옥의 심판관 미노스는 뱀에 감긴 채 당나귀 귀를 하고 있는데, 이 그림을 “외설적”이라 비난한 교황 의전관 비아조 다 체세나의 얼굴이라고 전해집니다.
그림이 완성된 뒤 트리엔트 공의회의 분위기 속에서 나체가 문제가 되자, 1564년(약 462년 전) 화가 다니엘레 다 볼테라가 주요 인물에 천을 덧그렸습니다. 그는 그 뒤로 ‘브라게토네(braghettone) — 바지 재봉사’라는 별명으로 불렸습니다.

왜 하필 이 언덕인가. 이곳은 로마 시대에 네로의 전차 경기장과 공동묘지가 있던 변두리였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베드로가 이 근처에서 순교해 그 묘지에 묻혔고, 326년경(약 1,700년 전) 콘스탄티누스가 굳이 언덕을 깎고 묘지를 메워 그 무덤 위에 성당을 세웠습니다. 평지를 두고 이 고생을 한 것 자체가 "여기에 무언가 있다"는 당시 확신의 증거로 읽힙니다.
1939~1950년대 교황청은 대성당 지하를 발굴해 로마 시대 묘지와, 붉은 벽에 그리스어로 ΠΕΤΡΟΣ ΕΝΙ(페트로스 에니 — "베드로가 여기 있다")로 읽히는 낙서를 찾아냅니다. 1968년 바오로 6세는 발견된 유골이 베드로의 것으로 "설득력 있게 확인됐다"고 발표했습니다. 다만 고고학적으로 100% 확정된 사안은 아니며 학계에 이견이 있습니다.
그리고 종교개혁. 옛 성당이 낡자 율리오 2세가 1506년(약 520년 전) 4월 18일 재건에 착수합니다. 문제는 돈이었습니다. 후임 레오 10세는 공사비를 대려고 독일 지역에서 면죄부 판매를 대대적으로 밀어붙였고, 이에 격분한 비텐베르크의 수도사 마르틴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95개조 반박문을 내겁니다. 루터는 1511년경 실제로 로마를 순례차 방문했고, 그때 본 성직자들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고 훗날 회고했습니다.
즉 눈앞의 이 거대한 성당과 개신교의 출발이 같은 사건의 앞뒤입니다. 성당은 1626년(약 400년 전) 11월 18일에야 봉헌됩니다 — 착공에서 120년, 루터의 반박문에서 109년 뒤입니다.

스페인 계단 Scalinata di Trinità dei Monti
이 계단의 국적은 좀 복잡합니다. 언덕 위 성당 트리니타 데이 몬티(1502년 착공, 1585년 봉헌, 약 524년 전)는 프랑스 왕실 소유였고 공사비도 프랑스 외교관이 남긴 유산에서 나왔는데, 광장 이름은 아래에 있던 스페인 대사관에서 왔습니다. 설계와 시공은 이탈리아인 프란체스코 데 산크티스. 1723년 착공해 1725년 완공된 135단입니다.
계단은 단순한 통로가 아니라 바로크 도시계획의 작품입니다. 폭이 일정하지 않고 세 번 넓어졌다 좁아지며, 중간중간 테라스로 끊깁니다. 오르내리는 사람이 무대 위의 배우처럼 보이도록 설계된 것입니다.
계단 아래 '난파선 분수(바르카차)'는 1627~1629년 피에트로 베르니니의 작품입니다. 아들 잔로렌초만큼 유명하진 않지만 이 분수는 영리합니다. 이 자리는 수압이 유난히 약해 물을 높이 뿜을 수 없었고, 그래서 아예 물에 잠겨 가라앉는 배 모양으로 만들었습니다. 약점을 주제로 바꾼 셈입니다.

계단 오른쪽 붉은 건물은 영국 시인 존 키츠가 1821년(약 205년 전) 스물다섯에 결핵으로 숨을 거둔 집이고, 지금은 키츠-셸리 기념관입니다. 봄이면 계단이 진달래 화분으로 덮이고, 아래 콘도티 거리는 로마의 명품 거리입니다.
광장 한쪽에 서 있는 높은 기둥은 무염시태 기념주(1857)입니다. 1854년(약 172년 전) 교황 비오 9세가 성모 마리아가 원죄 없이 잉태되었다는 교리를 공식 선포한 것을 기념해 세웠습니다. 이 교리는 가톨릭과 개신교가 갈리는 지점 중 하나로, 개신교는 성경에 근거가 없다고 보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매년 12월 8일 교황이 이곳에 와서 기둥 위 성모상에 화환을 바치고, 로마 소방대가 사다리차로 그 화환을 올립니다. 광장을 지나며 기둥을 보시면 "저건 19세기 교리 논쟁의 기념비구나" 하고 읽으실 수 있습니다.
트레비 분수 Fontana di Trevi
이 분수의 진짜 나이는 2000살입니다. 조각은 18세기지만 물은 기원전 19년(약 2,045년 전) 아그리파가 완공한 아쿠아 비르고 수도교를 타고 21km를 흘러오며, 지금도 같은 수원을 씁니다. 로마의 11개 고대 수도교 중 거의 유일하게 끊기지 않고 지금까지 작동하는 수도교입니다.
이름의 유래도 그 수도교에 있습니다. 물길을 찾던 로마 군인들에게 샘의 위치를 알려준 처녀의 전설에서 비르고(처녀)가 붙었고, 분수 오른쪽 위 부조가 바로 그 장면입니다. '트레비'는 세 갈래 길(tre vie)이 만나는 자리라는 뜻으로 봅니다.
현재의 분수는 교황 클레멘스 12세의 설계 공모에서 뽑힌 니콜라 살비가 1732년(약 294년 전) 착공했고, 살비가 1751년 세상을 떠난 뒤 주세페 파니니가 이어받아 1762년 완성했습니다. 너비 49m, 높이 26m로 로마 최대의 바로크 분수입니다.

가운데 인물은 흔히 넵튠으로 오해받지만 대양의 신 오케아노스입니다. 조개 마차를 두 마리 해마가 끄는데, 한 마리는 사납게 날뛰고 한 마리는 순합니다 — 거친 바다와 잔잔한 바다를 한 장면에 넣은 것입니다. 좌우의 여신상은 각각 풍요와 건강을 뜻합니다.
건물 벽에 분수를 통째로 붙여 만들었기 때문에, 좁은 골목을 돌자마자 갑자기 나타나는 극적인 등장도 설계의 일부입니다. 1960년 페데리코 펠리니의 영화 '달콤한 인생'에서 아니타 에크베리가 이 물에 들어가는 장면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해졌습니다.
일부러 “덜 다듬은” 것들
분수를 처음 보면 아래쪽이 미완성이거나 부서진 것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만든 것이 맞습니다. 뒤편 팔라초 폴리의 벽면은 자로 잰 듯 반듯한 신고전 양식인데, 그 아래는 깨진 자연 바위(scogli)를 흉내 내 일부러 거칠게 깎았습니다. 물이 인공 수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바위틈에서 솟는 샘처럼 보이게 하려는 연출입니다. 실패가 아니라 설계의 핵심입니다 — 이 분수의 원래 이름이 '처녀의 샘'이었다는 것을 떠올리면 더 그렇습니다.

그리고 훨씬 재미있는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분수를 정면으로 봤을 때 오른쪽 끝, 바위가 끝나고 난간이 시작되는 자리에 커다란 돌항아리가 하나 얹혀 있습니다. 구조적으로 하는 일이 없고, 화려한 바로크 구성에도 어울리지 않아 혼자 뚱하게 놓여 있습니다. 로마 사람들은 이것을 아소 디 코페(asso di coppe) — 이탈리아 카드의 '컵 에이스' — 라고 부릅니다. 생긴 것이 그 카드의 잔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전해지는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분수 오른쪽 팔라초 카스텔라니 1층에 이발소가 있었는데, 이발사가 공사 내내 살비의 설계를 두고 “저게 무슨 분수냐”고 훈수를 두었다고 합니다. 참다 못한 살비는 그 이발소 정면에 커다란 항아리를 세워 가게 안에서는 분수가 보이지 않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발사는 그 뒤로 평생 물소리만 듣고 살았다는 것이 이야기의 결말입니다.
베네치아 광장 Piazza Venezia
광장 이름은 15세기 건물 팔라초 베네치아(1455~1467, 베네치아 공화국 대사관 겸 추기경 저택)에서 왔습니다. 이 건물 발코니는 1929~1943년 무솔리니가 군중에게 연설하던 자리이기도 합니다. 로마의 주요 간선도로가 모두 이 광장에서 갈라지는, 도시의 교통 심장입니다.
광장을 압도하는 흰 대리석 덩어리는 통일 이탈리아의 초대 국왕을 기리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비토리아노)입니다. 1885년(약 141년 전) 착공해 통일 50주년인 1911년 개관, 1935년 완전히 마무리됐습니다. 설계는 주세페 사코니.

로마 사람들의 평판은 좋지 않습니다. 벽돌색 도시에 어울리지 않는 새하얀 브레시아 대리석을 쓴 데다, 짓느라 중세 구역과 고대 유적 일부를 헐었기 때문에 '웨딩케이크', '타자기', '틀니' 같은 별명으로 불립니다. 1921년부터 무명용사의 묘가 있어 조국의 제단(Altare della Patria)이라고도 하며, 경비병 두 명이 24시간 서 있습니다.
이 흰 건물과 오전에 본 바티칸은 서로 싸운 두 이탈리아의 상징입니다. 1870년(약 156년 전) 이탈리아 왕국군이 로마를 점령하면서 1000년 넘게 이어진 교황령이 소멸했고, 교황 비오 9세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 "바티칸의 포로"를 선언하며 성 베드로 광장 밖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후 약 60년간 교황과 이탈리아 정부는 서로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 갈등은 1929년 라테라노 조약으로 끝납니다. 이탈리아는 교황의 주권을 인정해 바티칸 시국(면적 0.44㎢,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을 만들어 주었고, 교황청은 이탈리아 왕국을 인정했습니다. 오늘 하루에 두 건물을 모두 보게 되는 셈입니다.
콜로세움 Colosseo전경
이 건물은 정치적 선언으로 시작했습니다. 네로는 64년 대화재 뒤 도심 한복판을 사유지로 삼아 인공 호수까지 갖춘 황금궁전(도무스 아우레아)을 지었고, 시민의 원성을 샀습니다. 네로가 죽고 내전을 수습한 베스파시아누스는 그 호수를 메우고 그 자리에 시민을 위한 경기장을 세웁니다. 황제의 정원을 시민에게 돌려준다는 뜻이었습니다.
서기 72년 착공, 80년 아들 티투스가 100일간의 경기로 개관, 82년 도미티아누스가 마무리했습니다. 정식 이름은 플라비우스 왕조를 딴 암피테아트룸 플라비움이고, '콜로세움'은 옆에 서 있던 네로의 거대 청동상 (colossus)에서 온 별명입니다. 공사비의 상당 부분은 70년 예루살렘 함락 때 가져온 전리품으로 충당됐다는 명문 해석이 있습니다.
네로 — 이 자리의 이전 주인
서기 64년 7월 18일 밤, 대전차경기장 근처에서 불이 났습니다. 9일간 타면서 로마의 14개 구역 중 3곳이 완전히 잿더미가 되고 7곳이 크게 상했습니다. 그리고 네로는 그 폐허 위에 자기 궁전을 지었습니다. 시민들이 방화를 의심한 것은 당연했습니다.
“네로가 불타는 로마를 보며 리라를 켰다”는 이야기는 유명하지만 확인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당시 그는 안치오에 있다가 급히 돌아와 이재민을 위해 자기 정원을 열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다만 그 뒤에 한 일이 문제였습니다.
네로는 방화 혐의를 그리스도인들에게 돌렸습니다. 이 장면을 기록한 사람은 교회 쪽이 아니라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입니다(『연대기』 15권, 서기 116년경). 그리스도인을 “가증스러운 미신을 믿는 자들”이라 부르며 적대적으로 썼기 때문에, 오히려 사료로서 신뢰도가 높다고 평가됩니다.
타키투스는 처형 방식까지 적었습니다 — 짐승 가죽을 씌워 개에게 물리고, 십자가에 매달고, 밤을 밝히는 횃불로 태웠다고 합니다. 그는 네로를 옹호하지 않고 “공익이 아니라 한 사람의 잔인함을 채우려는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이것이 로마 측 기록으로 남은 최초의 기독교 박해입니다.
전승은 이 박해 시기에 베드로와 바울이 순교했다고 전합니다. 오전에 본 성 베드로 대성당이 그 전승 위에 서 있고, 지금 보고 계신 이 경기장은 박해자의 정원 자리입니다. 같은 하루에 양쪽을 다 보는 셈입니다.
네로는 서기 68년 원로원에 의해 국가의 적으로 선포되자 서른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마지막 말이 “얼마나 위대한 예술가가 나와 함께 죽는가”였다고 전해집니다. 그의 이름은 기록에서 지워졌고(담나티오 메모리아이), 거대 청동상은 머리만 태양신으로 바꿔 재활용됐습니다 — 그 동상의 별명이 이 건물에 남았습니다.

장축 188m, 단축 156m, 높이 48m, 관중 약 5만 명. 80개의 출입구와 번호가 매겨진 좌석표(테세라)로 15분 만에 전원을 퇴장시킬 수 있었습니다. 현대 경기장의 설계 원리가 여기서 이미 완성돼 있었습니다. 좌석은 신분에 따라 층이 갈렸고, 맨 위 나무 관람석이 여성과 노예의 자리였습니다.
바닥 아래 지하층(hypogeum)에는 맹수와 무대장치를 끌어올리는 32개의 승강 장치가 있었고, 여름엔 벨라리움이라는 거대한 차양을 해군 출신 선원들이 밧줄로 폈습니다. 개관 경기 때는 경기장에 물을 채워 모의 해전을 벌였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523년(약 1,503년 전)까지 경기가 열렸고 이후 수백 년간 대리석 채석장으로 뜯겨나갔습니다 — 로마의 여러 성당과 궁전에 콜로세움의 돌이 들어가 있습니다. 지금 보이는 벽면의 수많은 구멍은 돌을 잇던 청동 꺾쇠를 뽑아간 자리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사자에게 던져진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여기서 순교가 있었다는 확실한 1차 사료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초기 교회의 순교 기록은 주로 다른 장소와 시기를 가리키고, 콜로세움을 순교지로 특정하는 전승은 중세 이후에 강해졌습니다. 정직하게 말하면 "가능성은 있으나 입증되지 않음"입니다.
그럼에도 이 건물이 오늘까지 남은 이유는 바로 그 전승 덕분입니다. 채석장으로 헐려 나가던 것을 1749년(약 277년 전) 교황 베네딕토 14세가 순교자의 피로 거룩해진 땅으로 선포하고 돌 반출을 금지하면서 훼손이 멈췄습니다. 경기장 안에 십자가가 세워진 것도 이때부터입니다.
지금도 매년 성금요일 밤이면 교황이 이곳에서 십자가의 길(Via Crucis) 기도를 이끕니다. 또 이탈리아가 사형제 반대의 표시로, 세계 어디선가 사형이 폐지되거나 집행이 취소될 때마다 콜로세움 조명을 금빛으로 바꾸는 관례를 두고 있습니다.
영화 속의 오늘 Roman Holiday
오늘 걷는 코스는 사실상 「로마의 휴일」의 촬영 동선입니다. 1953년(약 73년 전) 윌리엄 와일러 감독이 스튜디오 세트를 거부하고 로마 현지에서 통째로 찍은 영화라, 화면에 나오는 장소가 전부 실재합니다. 무명이던 스물넷의 오드리 헵번은 이 한 편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습니다.

스페인 계단 — 궁을 몰래 빠져나온 앤 공주가 계단에 앉아 젤라토를 먹다가 조 브래들리와 마주치는 장면이 여기입니다. 영화가 만든 이미지가 워낙 강해서 수십 년간 관광객들이 이 계단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었는데, 지금은 둘 다 금지입니다(2019년부터). 따라 해볼 수는 없고, 대신 “저기 어디쯤이었겠구나” 하고 보시면 됩니다.
트레비 분수 — 앤이 머리를 짧게 자르는 이발소가 분수 바로 옆 골목(비아 델라 스탐페리아)에 있는 설정입니다. 잘린 머리로 계단을 뛰어 내려오는 장면의 배경이 이 분수예요. 참고로 분수에 동전을 던지는 장면은 이 영화에 나오지 않습니다 — 그 이미지는 1954년 영화 「애천(3 Coins in the Fountain)」 쪽이 만들었습니다.
콜로세움과 베네치아 광장 — 두 사람이 베스파를 타고 정신없이 달리는 장면에서 지나갑니다. 오늘 버스로 지나는 그 길입니다.
Firenze — Montecatini
로마 → 피렌체(두오모 · 시뇨리아 광장 · 단테 생가 · 산타 크로체 · 베키오 다리) → 몬테카티니

피렌체 Firenze
기원전 59년(약 2,085년 전) 카이사르가 퇴역병을 정착시킨 식민시 플로렌티아('꽃피는 도시')가 기원입니다. 지금도 구시가의 도로가 직각으로 만나는 것은 로마 군단 주둔지의 격자 설계가 남은 흔적입니다.
중세에 이 도시는 모직물 가공과 금융으로 부를 쌓았습니다. 1252년(약 774년 전) 주조한 금화 피오리노는 순도가 일정해 유럽 전역의 기축통화가 됐고, 피렌체 은행가들이 영국 왕실에까지 돈을 빌려주었습니다. '파산(bankrupt)'이라는 말이 부서진 환전상 좌판(banca rotta)에서 왔다는 설도 이 도시 상인 문화와 닿아 있습니다.
1434년(약 592년 전)부터 약 300년간 메디치 가문이 공식 직함 없이 도시를 지배하며 브루넬레스키·도나텔로·보티첼리·미켈란젤로를 후원했습니다. 르네상스가 이 도시에서 터진 이유는 신비롭지 않습니다 — 돈과 경쟁심이 한곳에 몰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길드들이 서로 더 좋은 성당을 짓겠다고 경쟁했고, 그 경쟁이 예술을 밀어 올렸습니다.
1865~1871년에는 이탈리아 왕국의 임시 수도이기도 했습니다. 구시가는 1982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습니다.
두오모(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Duomo
이 성당의 이야기는 건축사에서 가장 무모한 도박입니다. 1296년(약 730년 전) 9월 8일 아르놀포 디 캄비오의 설계로 착공했는데, 도시는 당대 어떤 기술로도 덮을 수 없는 크기의 구멍을 일부러 남겨두고 성당을 지었습니다. 언젠가 누군가 방법을 찾아낼 거라고 믿은 것입니다. 그 구멍은 100년 넘게 하늘로 열린 채였고, 비가 오면 제단에 물이 들이쳤습니다.
브루넬레스키의 돔
1418년(약 608년 전) 돔 설계 공모에서 이긴 사람은 건축가가 아니라 금세공사 출신 필리포 브루넬레스키였습니다. 그는 설계안을 제대로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경쟁자 기베르티에게 아이디어를 뺏길까 봐, 심사위원들에게 "달걀을 탁자에 세워보라"고 하고는 밑을 깨서 세웠다는 일화가 남아 있습니다.
1420~1436년, 그는 지름 45.5m의 돔을 나무 거푸집 없이 올렸습니다. 비계를 세울 수 없을 만큼 높고 넓었기 때문입니다. 벽돌을 헤링본(청어뼈) 패턴으로 물려 쌓아 공사 중에도 스스로 버티게 했고, 안팎 두 겹의 껍질 사이를 비워 무게를 줄였습니다. 들어간 벽돌은 약 400만 장, 무게는 3만7000톤으로 추정됩니다. 자재를 올리기 위해 소가 끄는 역전 가능한 기중기까지 새로 발명했습니다.
지금도 세계에서 가장 큰 조적조(벽돌·돌만으로 쌓은) 돔입니다. 1436년(약 590년 전) 3월 25일 교황 에우제니오 4세가 봉헌했습니다.

옆의 종탑은 화가 조토가 1334년(약 692년 전) 착공해 1359년 완성한 85m 탑입니다. 맞은편 산 조반니 세례당은 11~12세기 건물로, 피렌체 사람들이 오랫동안 로마 신전을 개조한 것이라 믿었을 만큼 오래돼 보입니다. 단테가 여기서 세례를 받았고, 그는 이 건물을 "나의 아름다운 성 요한"이라 불렀습니다.
세례당 동쪽 청동문은 기베르티가 1425~1452년, 27년에 걸쳐 만들었고 미켈란젤로가 "천국의 문"이라 불렀습니다. 열 개의 패널에 구약 장면이 담겨 있습니다 — 아담과 하와, 카인과 아벨, 노아, 아브라함, 야곱과 에서, 요셉, 모세, 여호수아, 다윗, 솔로몬과 스바 여왕. (지금 달린 것은 복제이고 원본은 두오모 오페라 박물관에 있습니다.)
세례당이 왜 따로 서 있나. 초기 교회에서는 세례를 받아야 신자로서 본당에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에, 세례 공간을 아예 별도 건물로 지었습니다. 이탈리아 도시마다 성당 앞에 팔각형 건물이 따로 있는 이유입니다. 팔각형은 창조의 7일 다음인 '여덟째 날' — 곧 부활을 상징합니다.
1478년(약 548년 전) 파치 음모. 이 성당 안에서 암살이 일어났습니다. 메디치 가문을 제거하려던 경쟁 가문 파치가는 미사 중 성체를 드는 순간을 신호로 삼아 로렌초와 줄리아노 형제를 습격했습니다. 줄리아노는 열아홉 군데를 찔려 죽었고 로렌초는 성구실로 도망쳐 살았습니다. 대주교가 가담한 이 사건은 교황 식스토 4세(시스티나 예배당을 지은 그 교황)와 피렌체의 전쟁으로 번졌습니다.
베키오 다리 Ponte Vecchio
로마 시대부터 아르노강에서 가장 좁은 이 지점에 다리가 있었습니다. 1333년 대홍수로 쓸려간 뒤 1345년 지금 모습으로 재건됐습니다. 다리 위에 상점이 빼곡히 들어선 중세 다리가 통째로 살아남은, 유럽에서 매우 드문 사례입니다.
원래 입주자는 정육점·생선가게·무두장이였습니다. 다리 위에서 장사하면 내장과 오물을 그냥 강에 버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냄새가 문제가 된 것은 메디치 가문이 이 위를 지나다니기 시작하면서였습니다 — 1593년 대공 페르디난도 1세가 이들을 전부 쫓아내고 금세공사와 보석상만 들이도록 명령합니다. 오늘까지 이어지는 보석상 거리는 400년 된 칙령의 결과입니다.

상점 위층으로 지나가는 통로는 바사리 회랑입니다. 1565년(약 461년 전) 조르조 바사리가 단 다섯 달 만에 지었고, 메디치 가문이 시민과 섞이지 않고 피티 궁전에서 우피치까지 약 1km를 이동하던 사적 복도였습니다. 권력자의 동선이 도시 위로 떠 있는 셈입니다. 다리 중간, 회랑 창이 유난히 큰 구간은 1939년 히틀러의 방문에 맞춰 전망용으로 뚫은 것입니다.
1944년 퇴각하던 독일군은 연합군의 진격을 늦추려 피렌체의 아르노강 다리를 모두 폭파했습니다. 이 다리 하나만 남겨졌습니다. 대신 양쪽 진입로의 중세 건물들을 무너뜨려 길을 막았습니다. 1966년 대홍수 때는 강물이 다리를 덮쳐 보석상들이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시뇨리아 광장 Piazza della Signoria광장
두오모가 피렌체의 신앙이라면, 이 광장은 피렌체의 정치입니다. 13세기 말부터 도시의 권력이 여기 모였습니다. 광장을 지키는 요새 같은 건물이 베키오 궁전(1299~1314, 두오모를 설계한 아르놀포 디 캄비오)이고, 지금도 피렌체 시청으로 쓰입니다. 94m 종탑은 시민을 소집하거나 위험을 알리는 신호였습니다.
궁전 입구에 선 다비드는 복제입니다. 미켈란젤로가 1504년(약 522년 전) 완성한 원본이 바로 이 자리에 세워졌는데, 골리앗을 노려보는 소년이 강대국 사이에서 버티는 공화국 피렌체의 자화상으로 읽혔기 때문입니다. 원본은 1873년 아카데미아 미술관으로 옮겨졌습니다.
오른쪽의 지붕만 있는 회랑 로지아 데이 란치(1382)는 시민 집회장이자 지금은 지붕 없는 조각 전시장입니다. 광장 한쪽의 넵튠 분수(1565)를 두고 미켈란젤로가 "암마나티, 아까운 대리석을 망쳤군"이라 했다는 농담이 전해집니다.


사보나롤라는 성경에 나오는 인물이 아닙니다. 예수의 시대로부터 1400년도 더 지난 15세기 피렌체의 수도사이고,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19년 전에 교회의 부패를 공개적으로 공격하다 처형된 사람입니다. 이름은 지롤라모 사보나롤라(1452~1498).
바로 이 광장이 그의 무대입니다. 1497년(약 529년 전) 사순절 그의 추종자들이 사치품과 그림과 책을 쌓아 태운 '허영의 소각'이 여기서 있었고, 이듬해 1498년 5월 23일 그 자신이 같은 자리에서 교수형에 처해진 뒤 불태워졌습니다.
바닥을 살펴보시면 넵튠 분수 앞쪽에 둥근 대리석 표석이 박혀 있습니다. 처형 지점을 표시한 것으로, 지금도 해마다 5월 23일이면 그 위에 꽃이 놓입니다. 루터는 그의 옥중 시편 묵상을 읽고 서문을 붙여 출판하며 그를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평가했습니다.
단테 생가 Casa di Dante외관
『신곡』을 쓴 단테 알리기에리는 1265년(약 761년 전) 피렌체에서 태어났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 '단테의 집'이라 불리는 건물이 실제 생가라는 증거는 없습니다. 1911년 이 일대에 중세풍으로 지어 기념관으로 삼은 것입니다. 다만 그의 가문이 이 구역에 살았던 것은 사실입니다.
단테는 정쟁에 휘말려 1302년(약 724년 전) 추방당했고, 돌아오면 화형에 처한다는 선고까지 받았습니다. 그는 끝내 고향에 돌아오지 못한 채 1321년 라벤나에서 죽었고 그곳에 묻혔습니다. 『신곡』을 라틴어가 아닌 토스카나 방언으로 쓴 덕분에 그 말이 오늘날 표준 이탈리아어의 뼈대가 됐습니다.
근처 산타 마르게리타 성당은 그가 아홉 살에 베아트리체를 처음 보았다고 전해지는 곳이고, 그녀의 것으로 알려진 무덤이 있습니다.
『신곡』은 지옥·연옥·천국을 도는 여행기 형식의 신학서이기도 합니다. 단테는 지옥에 여러 명의 교황을 배치했습니다 — 성직 매매를 한 보니파시오 8세를 위한 자리를 미리 파놓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교회의 권위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교회의 타락을 심판한 것으로, 그런 점에서 사보나롤라와 루터로 이어지는 비판의 계보에 놓입니다.
산타 크로체 대성당 Basilica di Santa Croce외관
1294년(약 732년 전) 착공된 프란치스코회 성당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프란치스코회 성당입니다. 청빈을 서약한 수도회가 이토록 거대한 성당을 지었다는 사실 자체가 중세 후기 수도회가 겪은 긴장을 보여줍니다. 1442년 봉헌됐습니다.
이곳이 유명한 이유는 누가 묻혀 있는가 때문입니다. 미켈란젤로(1564년 사망, 로마에서 유해를 몰래 피렌체로 옮겨 왔습니다, 약 462년 전), 마키아벨리, 로시니, 그리고 갈릴레이가 잠들어 있어 '이탈리아 영광의 전당'이라 불립니다. 단테의 기념비도 있지만 그 안은 비어 있습니다 — 라벤나가 유해 반환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화려한 삼색 대리석 정면은 1863년(약 163년 전) 니콜로 마타스가 붙인 19세기 작업입니다. 유대인이었던 그는 성당 안에 묻힐 수 없어 문턱 아래에 묻혔습니다. 내부에는 조토가 14세기 초에 그린 프레스코가 있습니다.
이 성당 바닥에는 교회와 과학의 화해가 95년의 시차로 새겨져 있습니다. 갈릴레이가 1642년(약 384년 전) 죽었을 때 그는 여전히 이단 혐의를 진 신분이어서 본당에 묻히지 못하고 종탑 옆 작은 방에 임시로 안치됐습니다. 그를 미켈란젤로 맞은편의 번듯한 무덤으로 옮긴 것은 1737년, 죽은 지 95년 뒤였습니다.
7일차 피사에서 그의 사탑 실험 이야기를 듣게 되실 텐데, 그 이야기의 결말이 이 성당에 있는 셈입니다. 로마 교황청이 1633년(약 393년 전) 재판이 잘못됐다고 공식 인정한 것은 1992년입니다.
같은 도시의 다른 이야기 — 사보나롤라
앞에서 본 시뇨리아 광장은 실제로 이번 일정에 들어 있는 방문지입니다. 그 광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고 서면 풍경이 달라지므로, 조금 더 자세히 적습니다. (산 마르코 수도원은 일정에 없는 배경입니다.)
사보나롤라는 누구인가
먼저 헷갈리기 쉬운 것부터 정리하면, 성경 인물이 아닙니다. 지롤라모 사보나롤라(1452~1498)는 15세기 이탈리아의 도미니코회 수도사이자 설교자입니다. 페라라에서 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의학을 공부하다 스물둘에 수도원에 들어갔고, 피렌체 산 마르코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습니다. 개신교가 생기기 전이니 가톨릭 안에 있던 사람이고, 루터보다 30여 년 앞섭니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설교였습니다. 그는 교회 지도층의 사치와 성직 매매, 피렌체의 향락을 정면으로 비난했고 심판이 임박했다고 외쳤습니다. 마침 1494년(약 532년 전) 프랑스 군대가 쳐들어와 메디치 가문이 쫓겨나자, 그의 예언이 맞았다고 여긴 시민들이 그를 따랐습니다. 그렇게 몇 년간 도시의 실질적 지도자가 됩니다.
르네상스 피렌체는 예술의 도시이기만 했던 것이 아닙니다. 메디치 가문이 쫓겨난 뒤 도시를 사실상 이끈 사람이 바로 이 수도사였습니다. 그는 교회와 도시의 사치·부패를 맹렬히 공격했고, 시민들에게 회개와 검소를 설교했습니다.
1497년(약 529년 전) 사순절, 그의 추종자들은 시뇨리아 광장에 거울·화장품·사치품· 그리고 그림과 책을 쌓아 불태웁니다 — 이른바 '허영의 소각'입니다. 보티첼리가 자기 그림 몇 점을 직접 던져 넣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그러나 교황 알렉산데르 6세(보르자)와 충돌하면서 파문당했고, 여론이 돌아서자 체포됩니다. 1498년(약 528년 전) 5월 23일, 그는 같은 광장에서 교수형에 처해진 뒤 불태워졌고 재는 아르노강에 뿌려졌습니다. 지금도 그 자리 바닥에 둥근 표석이 박혀 있습니다.
사보나롤라는 교리상 가톨릭 안에 있었지만, 교회의 부패를 성경에 근거해 공개적으로 공격했다는 점에서 종교개혁의 예고편처럼 읽혀 왔습니다. 루터는 그의 옥중 시편 묵상을 읽고 "그리스도께서 그를 성인으로 삼으셨다"고 평하며 1523년(약 503년 전) 서문까지 붙여 출판했습니다.
그가 수도원장으로 있던 산 마르코 수도원에는 화가이자 수도사였던 프라 안젤리코가 1440년대에 그린 프레스코가 남아 있습니다. 수도사들이 기도하는 방마다 한 점씩 그려 넣은, 장식이 아니라 묵상을 위한 그림입니다. 계단을 올라서면 정면에서 만나는 '수태고지'가 가장 유명합니다.

영화 속의 피렌체 冷靜と情熱のあいだ
여행사 상품 설명에도 적혀 있는 그 영화입니다. 2001년(약 25년 전) 나카에 이사무 감독의 일본 영화로, 원작은 츠지 히토나리와 에쿠니 가오리가 같은 이야기를 남녀 시점으로 나눠 쓴 두 권짜리 소설입니다. (한국에서는 “냉정과 열정 사이” 두 권으로 함께 나왔습니다.)
줄거리의 핵심은 약속 하나입니다. 대학 시절 연인이던 준세이와 아오이는 “아오이의 서른 번째 생일에 피렌체 두오모에서 만나자”고 약속하고 헤어집니다. 10년이 흐르고, 각자 다른 삶을 살던 두 사람이 그 약속을 기억해 돔 꼭대기에서 재회하는 것이 마지막 장면입니다.

그 장면을 찍은 자리가 바로 브루넬레스키 돔의 꼭대기 전망대입니다. 463개의 계단을 올라가야 닿는 곳이고, 오르는 길에 돔의 이중 껍질 사이를 직접 지나갑니다. 영화 덕분에 한국에서 “두오모는 연인들의 성지”라는 말이 퍼졌는데, 사실 그 표현 자체가 이 영화에서 나온 것입니다. 정작 피렌체 사람들에게 두오모는 600년 된 성당일 뿐입니다.
영화에는 아르노강과 베키오 다리, 산 미니아토 알 몬테 언덕도 나옵니다. 오늘 두오모와 베키오 다리를 모두 지나니, 화면에서 본 두 곳을 하루에 밟는 셈입니다.
몬테카티니 테르메 Montecatini Terme
오늘과 7일차의 숙박지입니다. 온천 자체는 로마 시대부터 알려졌고 1387년(약 639년 전) 문헌에도 나오지만, 이곳이 '도시'가 된 것은 1773년 토스카나 대공 피에트로 레오폴도가 말라리아가 도는 습지를 정비하고 '테르메 레오폴디네'를 세우면서부터입니다. 지명의 '테르메'가 곧 온천이라는 뜻입니다.
전성기는 20세기 초 벨 에포크였습니다. 베르디와 푸치니가 여름마다 머물며 작업했고, 유럽 사교계가 이 물을 마시러 몰려왔습니다. 그래서 온천장들이 목욕탕이 아니라 신전이나 극장처럼 생겼습니다 — 테투초 온천의 대리석 열주와 스테인드글라스가 대표적입니다. 이곳의 물은 담그는 물이 아니라 마시는 물이었습니다.

2021년 '유럽의 대온천 마을' 11곳의 하나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됐습니다. 독일 바덴바덴, 영국 바스, 체코 카를로비바리 등과 한 묶음입니다.
Venezia
몬테카티니 → 베네치아 · 산 마르코 광장 · 산 마르코 대성당(전경) · 두칼레 궁전(전경) · 탄식의 다리

베네치아 Venezia
전승은 421년(약 1,605년 전) 3월 25일 정오에 리알토에 첫 교회가 섰다고 못 박습니다. 실제로는 5~7세기에 게르만족과 훈족을 피해 본토에서 도망친 사람들이, 아무도 탐내지 않던 갯벌로 들어간 것이 시작입니다. 적이 말을 타고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이 유일한 장점이었습니다.
도시는 물 위에 떠 있지 않습니다. 수백만 개의 나무 말뚝을 진흙 바닥에 촘촘히 박고 그 위에 이스트리아산 돌판을 얹어 세웠습니다. 산소가 없는 갯벌 진흙 속에서 나무는 썩지 않고 오히려 광물처럼 굳었습니다 — 1000년 넘은 말뚝이 아직 도시를 받치고 있습니다. 말뚝용 목재는 대부분 오늘날 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 쪽 산림에서 잘라 왔습니다.
697년(약 1,329년 전) 첫 도제(Doge)를 뽑은 이래 1797년 5월 12일 나폴레옹에게 항복할 때까지 약 1100년간 공화국이었습니다. 유럽에서 가장 오래 지속된 공화국이고, 도제는 선거로 뽑히되 권한이 촘촘하게 제한된 사실상의 입헌 원수였습니다. 가문 하나가 권력을 잡지 못하도록 선거 절차를 열 단계 넘게 꼬아 놓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118개의 섬, 150여 개의 수로, 400여 개의 다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자동차가 전혀 다니지 않는 도시이며, 1987년 석호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됐습니다.
산 마르코 대성당 Basilica di San Marco전경
828년(약 1,198년 전), 베네치아 상인 두 사람이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복음서 저자 마르코 — 우리말 성경의 마가 — 의 유해를 가져옵니다. 이슬람 세관을 통과하려고 돼지고기 밑에 숨겼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 검사관이 손대지 않을 것을 노린 것이죠. 성당 정면 왼쪽 모자이크가 그 도착 장면을 자랑스럽게 그리고 있습니다.

832년(약 1,194년 전) 그를 모실 첫 성당이 세워졌고, 976년 반란의 화재로 탄 뒤 1063년 재건에 들어가 1094년 봉헌한 것이 지금의 건물입니다. 1807년까지 이 성당은 대성당(주교좌)이 아니라 도제의 개인 예배당이었습니다. 국가 원수의 예배당이 도시에서 가장 화려한 건물이었다는 뜻입니다.

서유럽 한복판에 비잔틴 양식(그리스식 십자 평면에 돔 다섯)이 서 있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 도시는 로마보다 콘스탄티노플과 훨씬 가까운 상인 국가였습니다. 내부 약 8000㎡가 황금 바탕 모자이크로 덮여 '황금의 교회(Chiesa d'Oro)'라 불립니다. 모자이크는 11세기부터 19세기까지 800년에 걸쳐 조금씩 채워졌습니다.
정면의 청동 말 네 마리는 1204년(약 822년 전) 콘스탄티노플에서 가져온 전리품으로, 원본은 실내 박물관에 있고 밖의 것은 복제입니다. 제단 뒤의 팔라 도로(Pala d'Oro)는 금판에 보석 약 2000개를 박은 제단 장식으로, 976년부터 1345년까지 여러 번 증축됐습니다.
마르코와 마가는 같은 사람입니다. 헷갈리기 쉬운데, 이름 하나를 언어마다 다르게 옮긴 것뿐입니다. 그리스어 신약의 마르코스(Μᾶρκος)를 우리말 성경은 마가로, 이탈리아어는 마르코(Marco)로 적습니다. 영어로는 Mark, 라틴어로는 Marcus입니다. 그러니 산 마르코 대성당 = 성 마가 대성당이고, 베네치아의 수호성인은 마가복음의 그 마가입니다. 이 페이지에서는 이탈리아 지명일 때는 마르코로, 성경 이야기를 할 때는 마가로 적었습니다.
그는 신약의 마가복음 저자로 여겨지는 인물입니다. 사도행전에는 "마가라 하는 요한"으로 나오며, 바나바의 조카이자 1차 전도여행 중 도중에 돌아간 일로 바울과 바나바가 다투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사도행전 15:37–39). 훗날 바울은 그를 다시 인정합니다.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디모데후서 4:11
2세기 파피아스의 기록은 마르코가 베드로의 통역자였고 베드로의 설교를 받아 적어 복음서를 썼다고 전합니다. 또 다른 전승은 그가 알렉산드리아 교회를 세우고 그곳에서 순교했다고 하며, 베네치아가 유해를 가져온 것도 그래서입니다.
날개 달린 사자가 베네치아의 상징인 것도 여기서 나옵니다. 에스겔서와 요한계시록의 네 생물(사람·사자·소·독수리)을 네 복음서 저자에 대응시키는 전통에서 사자가 마가에 배정되기 때문입니다. 베네치아 곳곳의 사자상이 펼친 책에는 PAX TIBI MARCE EVANGELISTA MEUS(마르코, 나의 복음사가여 네게 평화가 있으라)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늘도 있습니다. 1204년(약 822년 전) 4차 십자군은 원래 이집트로 가려던 것이 베네치아의 뱃삯 문제와 정치적 계산 속에 방향을 틀어, 같은 그리스도인 도시 콘스탄티노플을 약탈했습니다. 1054년 갈라진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골이 이 사건으로 회복 불가능해졌습니다. 눈앞의 청동 말은 그 약탈의 전리품입니다. 2001년 요한 바오로 2세가 이 일에 대해 공식적으로 유감을 표명했습니다.
두칼레 궁전 Palazzo Ducale전경
810년경(약 1,216년 전) 요새로 시작해 화재로 몇 번을 다시 지었고, 1340년부터 지금의 베네치아 고딕 건물이 됩니다. 도제의 관저이자 정부 청사이자 대법정이자 감옥이었던, 말하자면 공화국 그 자체인 건물입니다.
구조를 보면 뭔가 거꾸로라는 느낌이 듭니다 — 무거운 벽체가 위에 있고 아래는 가느다란 아치로 뻥 뚫려 있습니다. 성이라면 있을 수 없는 형태입니다. 석호가 지켜주니 방어할 필요가 없다는 정치적 자신감의 과시입니다.

대회의실(Sala del Maggior Consiglio)에는 틴토레토가 1588~1592년 그린 '천국'이 걸려 있습니다. 가로 22m로 세계 최대급 캔버스 유화입니다. 벽 위쪽에는 역대 도제의 초상이 줄지어 있는데, 한 자리만 검은 천으로 덮여 있습니다 — 1355년(약 671년 전) 쿠데타를 시도하다 참수된 마리노 팔리에로이고, 천에는 "범죄로 참수된 자리"라고 적혀 있습니다.
회랑 벽에 있는 '사자의 입(Bocca di Leone)'은 익명 밀고함입니다. 시민이 탈세나 반역 혐의를 적어 넣으면 국가 심문관이 처리했습니다. 투명한 공화국의 이면에 있던 감시 체계입니다.
산 마르코 광장 Piazza San Marco
베네치아에서 '피아차(piazza)'라 불리는 곳은 여기 하나뿐입니다 — 나머지는 전부 '캄포(campo, 들판)'입니다. 원래 이곳도 과수원이 있는 들판이었고 가운데로 수로가 흘렀는데, 1177년(약 849년 전) 교황과 황제의 화해 회담을 이곳에서 열기 위해 메우고 포장했습니다. 나폴레옹이 "유럽에서 가장 우아한 응접실"이라 했다고 전해집니다.

98.6m 종탑(캄파닐레)에는 극적인 사연이 있습니다. 912년경(약 1,114년 전) 등대 겸 감시탑으로 시작해 1514년 지금 형태가 됐는데, 1902년 7월 14일 아침 조용히 무너져 내렸습니다. 며칠 전부터 균열이 커져 사람들을 대피시킨 덕에 사망자는 없었습니다(관리인의 고양이 한 마리만 희생됐다고 전합니다). 옆의 성당도 거의 다치지 않았습니다.
시의회는 그날 저녁 "있던 그대로, 있던 자리에(com'era, dov'era)"를 결의했고, 1912년 4월 25일 — 성 마르코 축일 — 똑같은 모습으로 다시 문을 열었습니다.
광장 시계탑(1499년, 약 527년 전)의 청동 인형 둘은 500년 넘게 정시마다 종을 칩니다. 오래되어 표면이 검게 변한 탓에 베네치아 사람들은 이들을 '무어인'이라 부릅니다. 시계판은 시각뿐 아니라 달의 위상과 황도 12궁을 함께 표시합니다.

Verona · Sirmione · Parma
베네치아 → 베로나(아레나 · 에르베 광장) → 시르미오네(스칼리제로 성 · 가르다 호수) → 파르마
베로나 아레나 Arena di Verona외관
서기 30년경에 지어졌으니 3일차에 본 콜로세움보다 약 50년 빠릅니다. 이탈리아에 남은 로마 원형경기장 중 세 번째로 크고, 무엇보다 지금도 현역으로 쓰이는 가장 큰 고대 건물입니다. 베로나는 기원전 89년 로마 자치시가 됐고, 알프스를 넘는 길목이라 군사·교통의 요지였습니다. 2000년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에 등재됐습니다.
1117년 대지진으로 바깥 벽이 거의 다 무너지고 아치 네 칸만 살아남았습니다 — 오늘 보시는 '날개(ala)'가 그 잔해입니다. 반면 안쪽 관중석은 온전히 버텨서 3만 명을 수용했습니다. 로마인의 시공 품질을 보여주는 우연한 증거인 셈입니다. 중세에는 이 안에 집과 상점이 들어서 하나의 마을처럼 쓰이기도 했습니다.

1913년 8월 10일, 베르디 탄생 100주년을 맞아 이곳에서 '아이다'가 공연되며 아레나 오페라 축제가 시작됐습니다. 여름마다 1만5000석이 차고, 마이크 없이 육성이 꼭대기까지 닿습니다. 관객이 작은 촛불을 들고 개막을 기다리는 것이 이곳의 오래된 관례입니다.
베로나 전승은 이 원형경기장을 성 피르모와 성 루스티코의 순교지로 기억합니다. 304년(약 1,722년 전) 디오클레티아누스 박해 때 처형됐다고 전해지는 두 사람으로, 시내에 이들을 기린 성당이 있습니다. 다만 콜로세움과 마찬가지로 당대의 확실한 기록이 아니라 후대의 전승이라는 점은 함께 알아두시면 좋습니다.
베로나의 진짜 수호성인은 성 제노(?~380년경)입니다. 북아프리카 출신으로 362년경(약 1,664년 전) 베로나의 여덟 번째 주교가 되었고, 남아 있는 그의 설교문 약 90편은 4세기 라틴 교회가 성경을 어떻게 읽고 가르쳤는지 보여주는 귀한 자료입니다. 같은 세기에 히에로니무스가 성경을 라틴어로 옮긴 불가타(382~405)가 나왔고, 이후 1000년 넘게 서방 교회의 성경이 됩니다. 그가 아리우스파와 싸우며 정통 신앙을 지킨 인물로 기록된 점도 중요합니다 — 325년 니케아 공의회 이후 삼위일체 논쟁이 아직 뜨겁던 시대였습니다.

에르베 광장 Piazza delle Erbe
'허브 광장'이라는 이름 그대로 채소와 약초 시장이 서던 자리이고, 그 아래는 로마 시대의 포룸입니다. 정치와 상업의 중심이 2000년 동안 자리를 옮기지 않은, 흔치 않은 사례입니다. 지금도 노점이 섭니다.
가운데 '마돈나 베로나' 분수는 1368년(약 658년 전)에 세워졌는데, 조각상 자체는 서기 380년경 로마 조각을 재활용한 것입니다. 로마 여신상이 1000년 뒤 성모의 이름으로 다시 선 셈으로, 이탈리아 도시에서 흔히 보이는 재사용의 역사를 보여줍니다.
84m 람베르티 탑은 1172년(약 854년 전)에 착공해 1463~1464년 지금 높이가 됐습니다. 광장 한쪽 기둥 위에 선 날개 달린 사자는 1405년부터 이 도시를 지배한 베네치아 공화국의 표식입니다 — 어제 베네치아에서 본 그 사자입니다. 북쪽의 마페이 궁(1668)과 알록달록한 프레스코 건물들이 광장을 둘러쌉니다.

베로나를 13~14세기에 지배한 것은 스칼라(스칼리제리) 가문입니다. 단테가 1312년(약 714년 전) 이 도시에 망명해 있을 때 후원해 준 것이 이 가문의 칸그란데 1세였고, 단테는 '신곡' 천국편을 그에게 헌정했습니다. 오늘 오후에 볼 시르미오네의 성도 같은 가문이 지었습니다.
시르미오네 · 스칼리제로 성 Castello Scaligero외관
가르다 호수 남쪽으로 4km 가늘게 뻗은 반도, 그 끝에 마을이 있습니다. 13세기 중반 스칼라 가문이 축조한 성인데, 해자가 아니라 호수 물 자체가 성을 통째로 두릅니다. 안쪽에는 함대를 대는 항구까지 있어서, 도개교를 올리면 완전한 섬이 됐습니다. 유럽에서 보존 상태가 가장 좋은 호수 요새 중 하나로 꼽힙니다.
이 성은 관광용이 아니라 실전용이었습니다. 가르다 호수는 밀라노(비스콘티)와 베네치아 사이의 수상 국경이었고, 성은 통행세를 걷고 함대를 숨기는 기지였습니다. 성벽 위 톱니 모양이 제비꼬리처럼 갈라진 것은 기벨린(황제파)의 표식입니다 — 교황파(구엘프)는 네모난 톱니를 썼습니다. 중세 이탈리아의 정치 성향이 건물 실루엣에 그대로 새겨져 있는 셈입니다.

반도 끝에는 '카툴로의 동굴(Grotte di Catullo)'이라 불리는 1~2세기 로마 대저택 유적이 있습니다. 실제로는 동굴이 아니라 무너진 별장의 지하 구조물인데, 기원전 1세기 시인 카툴루스가 이 반도를 "섬과 반도의 보석"이라 노래한 데서 이름이 붙었습니다.

가르다 호수 Lago di Garda
면적 370㎢로 이탈리아에서 가장 큰 호수이며 최대 수심은 346m입니다. 마지막 빙하기에 알프스 빙하가 계곡을 깎아내고 물러가면서 남긴 지형이라, 북쪽은 절벽이 물로 곧장 떨어지고 남쪽은 완만한 언덕입니다. 한 호수 안에서 풍경이 둘로 갈립니다.
거대한 물이 온도를 붙잡아 주기 때문에 위도에 맞지 않게 레몬과 올리브가 자랍니다. 18~19세기에는 북쪽 마을들이 레몬 온실(limonaia)을 지어 알프스 문턱에서 감귤을 길렀습니다. 바람이 규칙적으로 불어(오전엔 북풍 '페레르', 오후엔 남풍 '오라') 요트와 윈드서핑의 명소이기도 합니다.
괴테가 1786년(약 240년 전) 이탈리아 기행 중 이 호수를 지나며 감탄했고, 바이런과 D. H. 로렌스도 물가에 머물며 글을 썼습니다.
파르마 Parma
오늘의 숙박지입니다. 기원전 183년(약 2,209년 전) 로마의 식민시로 건설됐고, 도시를 관통하는 에밀리아 가도(BC 187) 덕에 일찍부터 교역 도시로 자랐습니다. 1545~1859년에는 파르마 공국의 수도였습니다.
대성당은 1059년(약 967년 전) 착공해 1106년 봉헌됐습니다. 돔에는 코레조가 1526~1530년 그린 '성모 승천'이 있는데, 천장을 뚫어 하늘을 열어놓은 듯한 착시 기법으로 이후 바로크 천장화의 원형이 된 그림입니다. 당대에는 너무 파격적이어서 "개구리 다리를 뒤섞어 놓은 것 같다"는 혹평도 받았습니다.

대성당 옆 분홍빛 팔각형 건물이 세례당입니다. 1196년(약 830년 전) 베네데토 안텔라미가 시작해 1307년 완성됐고, 로마네스크에서 고딕으로 넘어가는 문턱의 작품으로 평가됩니다. 안텔라미는 건축가이자 조각가로서 정문 부조부터 내부의 열두 달 노동 연작까지 직접 새겼습니다.

세례당이 팔각형인 데는 신학이 있습니다. 창조의 7일 다음 날, 곧 '여덟째 날'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새 창조를 뜻합니다. 세례를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는 일로 본 초대 교회의 이해(로마서 6:4)가 건물 평면에 그대로 들어간 것입니다.
파르마 세례당 안쪽은 아래에서 위로 구약 → 신약 → 천상 순으로 그림이 올라갑니다. 글을 모르는 중세 신자에게 건물 자체가 펼쳐진 성경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 도시의 공작 인쇄소에서 일한 잠바티스타 보도니가 1768년(약 258년 전)부터 판 활자가, 오늘날까지 쓰이는 '보도니' 서체입니다 — 아래 상자의 글자가 바로 그 서체입니다.

보도니 활자의 특징은 한 글자 안에서 획 굵기가 극단적으로 갈린다는 점입니다. 세로획은 두껍고 가로획과 세리프(획 끝의 삐침)는 머리카락처럼 가늘며, 그 삐침이 비스듬하지 않고 칼로 자른 듯 수평입니다. 이런 양식을 디도네(Didone)라 부르고, 18세기 말 인쇄 기술이 정밀해지면서 비로소 가능해진 모양입니다.
Cinque Terre · Pisa
파르마 → 친퀘테레(리오마조레) → 피사(사탑 · 두오모 외관) → 몬테카티니

친퀘테레 Cinque Terre
'다섯(cinque) 땅(terre)'이라는 이름 그대로, 리구리아 해안 절벽에 매달린 다섯 마을입니다 — 북에서 남으로 몬테로소 알 마레 · 베르나차 · 코르닐리아 · 마나롤라 · 리오마조레. 11세기부터 정착 기록이 나오고, 베르나차는 1080년(약 946년 전) 문헌에 등장합니다.
왜 하필 이런 데 집을 지었을까요. 사라센 해적 때문입니다. 바다에서 잘 보이지 않는 절벽 주름에 집을 붙여 지었고, 위쪽에는 망루를 세웠습니다. 집을 알록달록하게 칠한 것은 어부가 바다에서 자기 집을 찾기 위해서였다고 전해집니다. 다섯 마을 중 코르닐리아만 바다에 닿지 않고 언덕 위에 있는데, 해적을 가장 두려워한 결과입니다.

그런데 이 지역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건물이 아니라 밭입니다. 900년 동안 경사면에 돌을 쌓아 만든 계단식 밭의 석축을 전부 이으면 약 6700km, 만리장성에 맞먹는 길이라는 계산이 있습니다. 이 거대한 인공 지형 덕분에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됐고 1999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됐습니다. 이곳에서 나는 달콤한 와인 샤케트라는 그 계단밭에서만 나옵니다.
2011년 10월 큰 산사태로 몬테로소와 베르나차가 심하게 무너졌고, 복구 과정에서 방치된 계단밭이 산사태의 원인이었음이 드러났습니다. 사람이 손을 놓자 900년 된 석축이 무너진 것입니다. 지금은 밭 복원이 국립공원의 핵심 사업입니다.
마을마다 언덕 위에 성당이 하나씩 있습니다. 몬테로소의 산 조반니 바티스타 성당(1307년 봉헌, 약 719년 전)처럼 대개 14세기 리구리아 고딕 양식으로, 검고 흰 줄무늬가 특징입니다. 어촌 공동체가 가장 좋은 자리와 가장 많은 비용을 성당에 쓴 흔적입니다.
이 다섯 마을은 순례길과도 닿아 있습니다. 중세에 로마로 향하던 비아 프란치제나 순례길이 이 지역 내륙을 지났고, 해안 마을들은 순례자와 십자군 선박에 물과 포도주를 대는 보급지 역할을 했습니다.


피사의 사탑 Torre di Pisa외관
피사는 11~13세기에 제노바·베네치아와 지중해를 두고 겨루던 해양공화국이었습니다. 지금은 바다에서 10km 떨어져 있지만, 당시에는 아르노강 하구의 항구 도시였습니다. (강이 실어 온 토사가 쌓여 육지가 된 것입니다 — 사탑이 기운 것도 결국 같은 지질 조건 때문입니다.)
기적의 광장
두오모는 1063년(약 963년 전) 팔레르모 해전의 전리품으로 착공해 1118년 봉헌했고, 세례당은 1152년 착공해 1363년 완성됐습니다. 사탑은 두오모의 종탑으로 1173년 8월에 착공됐습니다. 네 건물이 잔디밭 위에 흩어져 있는 이 배치는 당시 유럽에서 보기 드문 것으로, 1987년 유네스코에 등재됐습니다.
왜 기울었나
문제는 5년 만에 드러났습니다. 1178년(약 848년 전), 3층까지 올린 시점에서 남쪽으로 기울기 시작합니다. 지반은 무른 점토와 모래였고 기초 깊이는 3m에 불과했습니다. 여기서 역설적인 일이 벌어집니다 — 피사가 이웃 도시들과 전쟁을 하느라 공사가 약 100년간 중단된 것이 오히려 지반을 다지게 해 탑이 무너지지 않았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1272년 공사를 재개하면서 장인들은 기울어진 쪽 층을 더 높게 쌓아 수직을 맞추려 했습니다. 그래서 탑은 사실 바나나처럼 살짝 휘어 있습니다. 종루는 1372년에야 얹혔습니다 — 착공에서 199년이 걸린 셈입니다.
높이 약 57m, 무게 1만4500톤, 내부 294계단. 1990년 붕괴 위험으로 폐쇄되어 북쪽 지반의 흙을 조금씩 빼내는 공법으로 기울기를 잡은 뒤 2001년 재개장했고, 각도는 5.5°에서 약 4°로 줄었습니다. 앞으로 200년 이상 안정적일 것으로 봅니다.
갈릴레이가 이 탑에서 무게가 다른 두 공을 떨어뜨렸다는 이야기는 제자 비비아니가 훗날 기록한 것으로, 실제 실험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다만 갈릴레이가 피사 출신이고 이 도시 대학에서 가르쳤던 것은 사실입니다.
갈릴레이 — 이 여행에서 세 번 만나는 사람
그는 1564년 이 도시에서 태어났습니다. 미켈란젤로가 죽은 해입니다. 의사가 되라는 아버지 뜻으로 피사 대학 의학부에 들어갔다가 수학으로 돌아섰고, 스물다섯에 이 학교 수학 강사가 됩니다. 봉급이 형편없어 3년 만에 파도바로 옮겼습니다.
피사 대성당 안에는 흔들리는 램프를 보고 진자의 등시성을 깨달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등이 걸려 있습니다. 다만 그 램프는 그가 깨달았다는 시점보다 나중에 달린 것이라, 이 역시 후대에 붙은 이야기로 봅니다. 사탑 실험과 마찬가지로 “그럴듯하지만 확인되지 않음”입니다.
정리하면 이번 여행에서 그를 시간을 거꾸로 만나게 됩니다 — 4일차 피렌체에서 그의 무덤(1642년 사망, 1737년 이장)을, 5일차 베네치아에서 그의 전성기(1609년 망원경)를, 그리고 오늘 피사에서 그의 출생(1564년)을 봅니다.

성당이 전리품으로 지어졌다는 것은 이 시대를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피사 두오모의 공사비는 1063년(약 963년 전) 이슬람 세력과의 팔레르모 해전에서 얻은 전리품에서 나왔고, 정면에 그 사실을 새긴 명문이 남아 있습니다. 십자군 시대의 해양공화국들은 신앙과 상업과 전쟁을 한 덩어리로 여겼습니다.
세례당 안의 니콜라 피사노의 설교단(1260)은 미술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꼽힙니다. 수태고지·성탄·동방박사·성전 봉헌·십자가·최후의 심판을 새겼는데, 인물의 자세와 옷 주름이 고대 로마 조각을 연구한 흔적을 보여 르네상스의 예고로 평가됩니다.
세례당의 유명한 반향도 우연이 아닙니다. 돔 구조가 소리를 10초 넘게 붙잡아, 한 사람이 부른 음이 겹쳐 화음이 됩니다. 전례 음악이 건물과 함께 설계되던 시대의 산물입니다.
갈릴레이와 교회. 그는 1633년(약 393년 전) 로마의 종교재판에서 지동설 지지를 철회해야 했고 가택연금 상태로 생을 마쳤습니다. 1992년 요한 바오로 2세는 조사위원회의 결론을 받아들여 당시 재판이 잘못됐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했습니다. 359년이 걸린 셈입니다.
Orvieto — Roma
몬테카티니 → 오르비에토(두오모 · 마을) → 로마 공항

오르비에토 Orvieto
화산재가 굳은 응회암(투포) 대지 위, 사방이 수직 절벽인 300m 바위섬에 도시가 통째로 올라앉아 있습니다. 멀리서 보는 전경이 유명한 이유이자, 이 도시가 3000년을 살아남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기원전에는 에트루리아 12개 도시 중 하나(벨즈나로 추정)로 번성했습니다. 에트루리아인은 로마 이전 이탈리아 중부의 주인이었고, 로마에 아치 공법과 점술, 검투 경기를 물려준 문명입니다. 기원전 264년(약 2,290년 전) 로마에 파괴됐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발밑입니다. 응회암은 무르고 파기 쉬워서, 주민들은 2500년 동안 자기 집 아래를 파 내려갔습니다. 그 결과 1200개가 넘는 동굴·우물·비둘기장이 얽힌 지하도시가 생겼습니다. 위층은 중세, 아래층은 에트루리아입니다.
중세 오르비에토는 교황의 피난처였습니다. 로마가 정쟁과 역병으로 위험할 때 교황들이 이 절벽 도시로 올라와 머물렀고, 13세기에만 다섯 명 이상의 교황이 여기서 정무를 봤습니다. 절벽이 곧 성벽이었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이 작은 도시가 한때 서방 교회의 임시 수도 노릇을 했고, 그것이 인구 2만 남짓한 곳에 어울리지 않는 거대한 두오모가 선 이유입니다.
오르비에토 두오모 Duomo di Orvieto
1263년(약 763년 전) 이웃 마을 볼세나에서, 성체의 실재를 의심하던 한 사제가 미사를 집전하다 빵에서 피가 흘러 성체포를 적셨다고 보고됩니다 — '볼세나의 기적'입니다. 당시 오르비에토에 머물던 교황 우르바노 4세가 그 성체포를 가져오게 했고, 이를 모시기 위해 1290년 11월 13일 교황 니콜라오 4세가 초석을 놓았습니다. 완공까지 약 300년이 걸렸습니다.
1310년(약 716년 전)부터 로렌초 마이타니가 맡은 정면은 금빛 모자이크와 대리석 부조로 덮여 있어, 해가 기울면 파사드 전체가 타오르듯 빛납니다 — 오후 늦게 도착하는 편이 유리합니다. 정면 하단 네 기둥의 부조는 창세기부터 최후의 심판까지를 새긴 것으로, 글을 모르는 사람도 읽을 수 있는 성경입니다. 측면의 검고 흰 가로줄무늬는 이 지역 현무암과 석회암을 번갈아 쌓은 것입니다.

안쪽 산 브리치오 예배당에는 프라 안젤리코가 1447년(약 579년 전) 시작하고 루카 시뇨렐리가 1499~1504년 완성한 '최후의 심판' 연작이 있습니다. 지옥으로 끌려가는 군상, 부활해 살을 되찾는 육체, 그리고 드물게 그려지는 적그리스도 장면까지 포함돼 있습니다. 인체를 격렬하게 뒤트는 이 프레스코는, 30여 년 뒤 시스티나 예배당에 같은 주제를 그린 미켈란젤로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습니다 — 3일차에 본 그림의 조상을 마지막 날에 만나는 셈입니다.

볼세나의 기적 이듬해인 1264년(약 762년 전), 교황 우르바노 4세는 칙서 Transiturus로 성체 성혈 대축일(Corpus Christi)을 온 교회의 축일로 제정합니다. 그리고 그 축일의 성무일도와 찬가를 쓴 사람이, 당시 오르비에토 교황청에 머물던 토마스 아퀴나스였습니다.
그가 이때 지은 Pange Lingua와 그 마지막 두 절인 Tantum Ergo는 지금도 불립니다. 신학사에서 가장 큰 저작인 '신학대전'을 쓰던 사람이 같은 시기에 찬송가를 썼다는 사실이 이 도시에 남아 있습니다.
기적의 성체포는 지금도 두오모 왼편 코르포랄레 예배당의 금·은 성유물함에 보관돼 있습니다. 개신교는 성체 안의 그리스도 임재를 가톨릭과 다르게 이해하므로 이 기적 서사를 신앙의 근거로 받아들이지 않지만, 왜 이런 거대한 성당이 여기 섰는지를 이해하는 데는 반드시 알아야 하는 배경입니다.
성 파트리치오 우물 Pozzo di San Patrizio
1527년(약 499년 전) 신성로마제국 군대가 로마를 약탈하자(사코 디 로마)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오르비에토로 피신합니다. 절벽 위 도시의 약점은 단 하나, 물이었습니다. 포위당하면 끝이라는 뜻입니다. 교황은 건축가 안토니오 다 상갈로에게 우물을 명했고 1527~1537년 10년에 걸쳐 완성됩니다.
깊이 54m, 지름 13m. 핵심은 이중 나선 계단입니다. 내려가는 계단과 올라오는 계단이 248단씩 서로 겹치되 한 번도 만나지 않도록 설계돼, 물통을 진 노새들이 마주쳐 길이 막히는 일이 없습니다. 창 72개로 빛이 들어옵니다. 레오나르도가 샹보르 성에 남긴 이중 나선 계단의 발상을, 장식이 아니라 토목의 문제 해결에 적용한 사례입니다.

이름은 아일랜드의 성 파트리치오 전설(끝없이 깊은 굴)에서 왔고, 이탈리아어로 "성 파트리치오의 우물 같다"는 표현은 지금도 '밑 빠진 독'이라는 뜻의 관용구로 쓰입니다.
이 우물은 종교개혁이 판 구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로마를 약탈한 황제 카를 5세의 군대에는 루터파 용병이 다수 섞여 있었고, 그들은 성 베드로 대성당을 마구간으로 쓰며 교황을 조롱했습니다. 3일차에 본 그 성당과 이 우물이 같은 사건의 양쪽 끝입니다.
파장은 더 멀리 갔습니다. 이때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사실상 황제의 포로였고, 황제는 캐서린 왕비의 조카였습니다. 그래서 교황은 헨리 8세의 혼인 무효 요청을 들어줄 수 없었고, 그 결과가 1534년(약 492년 전) 영국 교회의 로마 이탈입니다. 성공회의 출발점에 이 우물과 같은 사건이 놓여 있는 셈입니다.
Arrivederci
로마 → 인천
돌아오는 날
기원전 183년(약 2,209년 전)의 파르마에서 1911년의 비토리아노까지, 이번 9일은 약 2100년의 시간을 가로질렀습니다. 돌이켜보면 대부분 '지금 기술로는 안 되는 것'을 일단 짓기 시작하고 방법은 나중에 찾아낸 사람들의 기록이었습니다 — 브루넬레스키의 돔, 베네치아의 말뚝, 상갈로의 나선이 모두 그렇습니다.
교회사로 보면 이 여정은 박해받던 신앙이 제국의 종교가 되고, 거대한 건축이 되고, 그 건축비 때문에 다시 갈라지는 이야기를 순서 없이 통과했습니다. 나폴리 앞바다에 배를 댄 죄수 한 사람에서 시작해, 그 이름으로 지은 성당의 공사비가 유럽을 둘로 나누기까지 1500년이 걸렸습니다.